우리가 알지 못하는 중국, 알고 싶지 않은 중국
- 등록일
2025-04-30
2025년 4월호 인차이나브리프-저자노트는 『차이나 리터러시』의 저자인 김유익 선생의 글을 실습니다.
그의 저서는 반중·혐중 정서의 역사적·구조적 배경을 분석하며, 세대별 차이가 이러한 현상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탐구합니다. 기성세대의 ‘애증’과 MZ세대의 ‘21세기의 오랑캐’ 인식을 대비하며, 단순한 정치적 프레임이 아닌 문화적·사회적 변화 속에서 한중 관계를 이해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또한, 중국 공산당의 내부 통제와 외부 개방 사이의 모순을 지적하며, 중국을 본질화하지 않으면서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제안합니다. 나아가, 한중 관계를 재정립하는 출발점으로 조선족과의 관계 변화가 필수적임을 강조합니다.
이번 저자 노트를 통해, 한국과 중국을 보다 균형 잡힌 시각에서 성찰할 기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한국처럼 속도감 넘치는 사회에서 이미 출간된 지 2년이 다 돼가는 책을 논하는 것이 좀 면구스럽기는 하다. 시간이 지나도 읽힐 수 있는 내용을 쓰는 것이 필자들의 공통된 소망일 터인데, 대중매체에 2년간 연재된 칼럼이 책 내용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지라 어떤 내용들은 시의성이 부족할지 걱정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최근 한국 사회에서 반중, 혐중 분위기가 크게 부각되고 폭력적인 성향까지 띄게 된 것은 특정 세력의 뚜렷한 정치적 의도나 이와 연계된 미중 신냉전 프로파간다의 결과라는 사실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역사적,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21세기, 특히 2010년 이후 반복적으로 이런 현상이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4부로 구성된 졸저는 이 문제를 해명하고 대안을 제시하기 위한 단계적 접근 방법을 취하고 있다.
» 왜 지금 혐중일까?
제3부에 집중적으로 설명한 반중과 혐중의 뿌리는 세대별로 그 원인을 달리하고 있다고 본다. 20세기의 짐을 지고 21세기로 넘어온 필자와 같은 기성세대와 20세기를 전혀 알지 못하거나 밀레니얼 전환기를 통과해서 바로 21세기를 사는 MZ는 중국과 중화에 대한 인지 감수성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필자는 한국인 혹은 동아시아인의 정체성에서 국가와 민족 못지않게 문명이 차지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만일 19세기 말 조선인의 문명 정체성이 중화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었다면, 20세기는 근대문명 즉 서구와 동아시아 문명이 우리 정체성 안에서 치열하게 투쟁을 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특히 주체성을 상실한 채 일본이라는 필터를 통해서 반강제로 이식된 지식과 문화의 충돌이라서 현상이 더 왜곡된 채 발생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IMF 위기를 거친 후 들이닥친 21세기는 문자 그대로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구 현대문명이 우리, 특히 MZ 이후 세대의 의식과 정체성을 지배하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가 중화와 중국을 바라보는 관점은 우리 안에서도 현격히 차이를 가질 수밖에 없다.
필자는 기성세대의 문명 정체성이 현대 중국에 대한 애증의 감정을 낳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를 니체가 이야기한 원한의 정서 ‘르상티망(ressentiment)’으로 설명해 보았다. 다만 이를 “노예의 도덕”으로 국한하지 않고, 우리 민족이 가진 “특유의 저항정신”과 결합해서 낳은 변용으로써 어떤 가능성을 가지고 있을지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해 봤다.
반면 MZ는 이미 문명 정체성의 준거집단을 미국으로 교체한 이후 ‘대륙시리즈’의 중국밈을 보면서 자란 세대인지라 중국을 “21세기의 오랑캐”로 한자락 깔아 보는 마음을 깊이 품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중국의 급부상이 특이점을 돌파하거나 미국발 한중 관계 경색이 강화하면서 불안과 공포를 자극받고 있는 것 같다. 즉, MZ의 혐중은 밥그릇을 그들에게 빼앗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기인하고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한복-한푸 논쟁이나 김치-파오차이 논쟁 등은 중국보다는 한국 내에서 훨씬 크게 쟁점이 되고 있는데, 이는 두 기호가 K-컬쳐의 전성기를 구가하는 문화산업에 대한 알레고리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분석했다.
»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것이다.
책에도 소개한 것처럼 삼십 대 이후 필자가 중국의 여러 도시와 아시아 각지를 전전하며 생활하게 된 계기, 혹은 소싯적부터 동아시아 담론에 큰 관심을 기울였던 일은 주로 개인적인 동기에서 비롯하고 있다. 그런데 이 동기와 관련하여 오랫동안 품고 있던 질문에 대한 답변을 구함에 있어, 졸저를 집필하기 직전 번역 작업에 참여했던 중국 내 베스트셀러의 저자인 한 중국인 학자의 생각이 꽤 좋은 방향을 제시해 줬다. 그는 <주변의 상실>의 저자인 인류학자 샹뱌오(項飆)이다. 졸저에도 그의 사상에 대해서 많은 부분을 언급하고 있다.
중국의 MZ 청년들은 중국의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 미중 대결구도 속에서 한국의 청년들 못지않게 큰 정치경제적, 심리적 갈등을 겪고 있다. 샹뱌오는 필자와 같은 세대로서 이에 대한 여러 조언을 들려주는데, 그중 인상적인 표현이 “인명불인수(認命不認輸)”이다. 자신이 처한 현재적 상황을 상당 부분 결정해 버린 운명은 받아들이되, 그럼에도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한다는 뜻을 가진 말이다. 중국이라는 거대 문명과 국가가 처했던 운명, 혹은 그 안에서 공동체와 개인들이 처한 운명에서 느끼는 곤혹스러움과 이에 어떻게 대처할지 고민하면서 취할 수 있는 현명한 자세이다.
필자는 이 표현을 접하며, 과거 몸담았던 대안교육기관 ‘하자센터’에서 중요하게 여겼던 상징이 떠올랐다. 바로 중미 케츄아 원주민들의 전설 속 벌새 크리킨디(Kurikindi) 이야기다. 이 전설 속에서 산불 때문에 모두가 도망치는데, 크리킨디만이 불을 끄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는 이야기를 “I do what I can do(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겁니다).”라고 설명했던 것과 같은 맥락의 이야기로 들린다.
이런 태도는 어쩌면 본격적으로 미국과 어깨를 겨루게 되면서 “자신감이 뿜뿜하는” 강대국 중국이나 중국인들보다는 오히려 한국인들에게 용기와 지혜를 줄 수 있는 말이다. 중국이라는 수퍼 파워와 지속가능성이 높은 문명에 가장 인접하게 위치한 조선반도의 운명 자체는 우리가 절대로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중국을 한국과 일대일 비교가 가능한 평범한 ‘네이션 스테이트(nation state)’로 보기보다는 거대한 ‘플랫폼’이나 ‘제국기계’로 볼 것을 권한다. 그리고 특히, 국가 공무원이 아니라 일반인들을 상대해야 하는 보통의 한국인들은 중국이라는 국가보다는 지역, 그리고 사람들의 생활세계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이미 중국의 광둥성, 장쑤성, ‘저장성+상하이’ 등은 한국의 GDP에 육박하거나 이를 넘어서고 있고, 인구도 남북한을 합친 규모 이상이다.
한국이 중국과의 관계에서 ‘르상티망’에 빠지지 않고 건강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국가 대 국가의 시각이 아니라, 중국 내부의 지역과 도시, 사람들에 관한 관심을 높이는 접근법이 필요하다. 한국이 중국을 이해하는 방식을 보다 실질적으로 전환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중국인들의 생활세계를 찾아서
이러한 관점 바꾸기에 앞서 중국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중국의 낯선 모습에 대한 설명에 중점을 기울인 것은 졸저의 제1부와 2부이다. MZ뿐 아니라 중국에 대해 스스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기성세대들조차 실은 중국인들의 생활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필자 자신도 중국에서 장기간 그리고 중국인들과 일상을 공유하는 생활을 시작하기 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사실이다. 기성세대가 가진 지식과 선입견이 상당 부분 문헌에 묘사된 고전 속의 장엄하고 화려한 중화문명의 세계나 공산화 이후 이념의 안경을 쓰고 바라보는 중국 근현대사에 착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연재한 칼럼은 중화권 출간물의 서평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중국의 역사적 현실을 잘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몇 편의 글을 골라서 소개하였다. 이를테면, 당대 중국 지식인과 힙스터들이 대안역사 체제로 선호하는 송나라, 중국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기대를 조망하기에 좋은 SF 작품, 중국제조업 굴기의 기반이 된 역사적 장인문화 등이 있다.
또, 중국의 현재 대중문화 현황과 일부 중국의 문화 평론가들이 K-문화를 대하는 미묘한 태도에 대해서도 분석을 시도했는데, 한국인들만 중국에 대해 오랜 애증의 감정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상호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산둥과 둥베이을 비롯해 조선반도와 가까운 동북쪽의 중국인일수록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 본질화하지 않으면서 비판할 수 있는 중국과 공산당, 정치지도자들
중국에 대한 입체적인 이해를 위해서 시중의 대부분 중국 관련 서적의 내용을 점하는 “악마화”와 “중국때리기”의 관점을 피하면서도 비판적으로 논해야 할 당대 중국의 문제점을 고민하기도 했다. 현지의 생활 경험을 토대로, 또 외부 언론에서 과대하게 대표되는 대도시 중상층, 자유주의적 엘리트 중국인들뿐 아니라 중소도시와 농촌에 거주하는 보통 중국인들의 시각으로도 중국과 중국 정부의 부조리한 측면을 조명해 봤다. 필자는 특히 중국 공산당이 중시하는 여론은 전자보다는 다수를 점하는 후자의 것이라는 가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사회에서 문명과 체제의 다양성을 존중해달라고 요구하는 중국 정부 주장의 논리적 모순은 한마디로 내적인 다양성의 부재이다. 핵심이 공유하는 일치단결된 가치관과 그 규범을 거대한 국가의 변경 지대까지 일사분란하게 따를 것을 요구한다든가, 수천 년 넘게 상대적 자율과 자치의 공간이 보장됐던 하부 기층사회까지 과도하게 국가의 권력을 직접적으로 행사하는 문제점이다.
이것이 마오시대부터 이어지는 레닌주의 이념과 정당구조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개혁개방후 자본주의 기술사회가 저비용으로 가능하게 한 ‘테크노 법가(Techno-Legalism)’의 문제인지 알 도리가 없다. 어쨌든 과도하게 경직되고 균질적인 사회가 시스템의 유기성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것을 중국 동네살이에서 구체적으로 체험해 봤기 때문에 하는 소리이다.
» 새로운 중국, 새로운 한국, 새로운 한중 관계
필자가 내부에 사는 외부인의 관점으로서 희망하는 중국은 꼭 자유주의적이 아니더라도 일정하게 외부로 그 경계가 열려있는 세계이다. 수천 년의 역사를 통해서 진화해 온 중화 문명 자체가 많은 외부 요소를 받아들이고 자기 방식으로 소화하면서 성립되어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4부에서 특히 경계가 되는 중국의 남방, 그리고 우리 한민족과 역사가 중첩되는 동북지역의 서사를 갖춘 각각의 현대문학을 소개했다.
동시에 한국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적인 포지셔닝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면서 아세안과 같은 중국의 다른 이웃들의 사례를 참고해 보기도 했다.
이와 별개로, 필자는 새로운 한중 관계를 고민할 때 우선 주목해야 할 것이 한국인과 조선족의 관계라고 생각한다. 한중 수교 후 한국의 대내외적 경제발전 과정에서 조선족 동포들의 기여가 제대로 평가받은 적이 없다. 중국 내 한국 기업의 활약, 한국 내 3D 업종의 노동 모두 마찬가지이다. 이제 한중 관계에 대한 과거의 관점을 ‘리셋’하려면, 한국인들은 조선족과 새로운 관계 정립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가 조선족 동포와 맺고 있던 관계에 과거 30여 년 한중 관계의 모순이 농축돼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