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과자로 유명한 元祖食品은 1993년 상해에 上海元祖食品中心을 설립하고, 1994년부터 1998까지 항주, 무석, 성도, 북경에 지사를 세웠다. 2001년에는 중국에 총 5개의 공장과 150개의 소매점을 설치했으며 현재는 프랜차이징 방식으로 점포수를 확장하고 있다. 본사는 상해시 通州路에 있다.
중국 진출 동기
원조식품이 중국에 진출하게 된 동기는 1990년 대만에서 발표된 한 보고서 때문이었다. 대만에서 창업 5년된 회사의 생존율이 50%, 10년된 회사는 20%, 20년된 회사는 거의 10%도 되지 않는다는 보고서였다. 당시 원조식품은 대만에서 안정적인 성장을 거두고 있었고 대만에서 누구나 아는 유명기업이었지만 이 보고서를 보고 새로운 탈출구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미국의 대표적인 패스트푸드점인 맥도널드와 KFC가 대만시장에 진출한 후 해외시장 개척에 대한 생각이 더 커졌다.
시장조사와 현지조사
그래서 1990년 원조는 국제마케팅 부서를 설치하고 홍콩, 싱가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심지어 미국, 캐나다 등지로 시장조사를 떠났다. 당시 원조는 말레이시아에 첫 해외법인을 세우기로 했지만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중국시장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원조가 생산하는 식품이 화교를 포함한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고 그렇다면 가장 큰 시장은 중국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에 진출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원조는 2년간에 걸쳐 상해복단대학에 중국 대도시에 대한 시장조사를 위탁실시했고 동시에 대만에서도 같은 내용의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러나 결과는 완전히 상반됐다. 상해 복단대학의 보고서에는 중국진출시 전망이 매우 밝다고 했으나 대만보고서에서는 중국의 소비수준이 아직 높지 않아 시기상조라고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장조사 외에도 2년간 중국을 40여 차례 드나들면서 중국 각지의 주요 도시들을 방문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소비 수준이 높은 상해를 중국 진출의 첫 교두보로 결정했다.
중국진출 초기 - 가격경쟁에서 뒤쳐져
1993년 원조는 상해 虹口區의 국영기업인 好運到와 40:60 합자로 中國元祖를 세웠다. 조건은 중국측이 공장을 대고 원조가 110만 달러를 투자하는 것이다. 원조는 10여명의 기술자를 파견해 상해 직공들에게 기술을 전수했고 모든 제품의 생산과정을 비디오로 찍어 작업노트를 만들었다. 또 당시 대만에서 사용하던 판매방식을 중국에 적용, 현장에서 직접 만드는 과정을 시연하며 판매를 하여 적잖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중국산보다 2배나 비싼 원조 식품은 가격경쟁에서 뒤쳐질 수 밖에 없었다.
생크림케익으로 탈출구 마련
새로운 탈출구를 찾던 원조는 케익이 상해에서 아주 잘 팔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10월1일 국경일이나 친척, 친구를 방문할 때, 이사나 결혼, 아이 돌, 명절 등 케익이 선물용으로 각광을 받고 있었다. 원조는 케익을 생산하기로 결정하고 제2의 발전단계로 접어들었다.
원조는 당시 중국에 없던 생크림을 외국에서 수입해 현장에서 직접 생크림케익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고 이 방식은 금새 상해인들의 소비욕구를 부추겼다. 원조 케익은 다른 케익보다 3배나 비쌌지만 수요가 많아 오히려 부족한 상황이었고 자동제빵기를 구입하여 하루에 3천개의 케익을 생산 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원조는 상해 인근 지역으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고가 선물제품으로 승부
원조가 이렇게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상해인들의 소비심리를 정확히 파악하였을 뿐만 아니라 시기적으로도 잘 맞았기 때문이다. 원조가 고가 전략으로 승부를 건지 2년만에 중국에는 고가 선물세트가 등장하게 되었다.
원조가 상해에 진출할 초기에는 상해 문화에 상당히 생소해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고 그 과정에서 상품명, 포장디자인 등을 모두 현지에 맞게 수정했다. 예를 들어 대만에서는 나무상자로 포장을 하던 것을 중국에서는 양철로 만든 상자로 바꾸었고 흰색이나 노란색이던 상자색을 상해인들이 좋아하는 전통적인 색깔로 바꾸었다. 또 상해인들이 자전거를 교통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에 착안, 케익이 도중에 흔들려 망가지지 않도록 포장에 더 신경을 썼다.
프랜차이징 전략
원조는 기업이 성공하려면 비행기처럼 양날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중국 시장을 개척하는데 직영점과 가맹점이 양날개처럼 평행발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해에서의 높은 인지도와 시장이 성숙단계에 접어들면서 직영방식으로만 운영되던 원조는 가맹자를 모집하기 시작했다. 가맹자에게는 상권조사, 지역선택, 동종업계의 경쟁, 점포 시공설계, 직원모집훈련에서 개점 후 영업재무관리, 재고, 시장마케팅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서비스하였고, 1년만에 가맹점이 40여개로 늘어났다.
물론 초기 가맹점 확장 때에는 물류배송 문제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중국이 워낙 넓다 보니 소요되는 운송비용이 과대하고 특히 원조가 경영하는 상품이 모두 신선도를 중요시하는 식품이다 보니 더욱 그러했다. 원조는 전략을 수정, 福州를 중심으로 의욕이 높은 가맹자를 뽑아 점포를 개설했고 단기간에 4-5개로 점포를 늘릴 수 있었다.
재산권 보호 다툼
끊임없는 전략 수정을 통해 원조는 중국에서 기반을 마련했으나 그 과정에서 중국측과 재산권을 다투는 일도 벌어졌다.
당초, 중국측 합자인 가운데 홍위병 출신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은 대만기업들의 돈은 국민당이 중국에서 달아날 때 가져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도로 가져오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고, 1993년말, 재무팀을 만들어 회사의 모든 인감과 수표를 가져가 버리고 업무팀을 파견하여 생산라인을 장악했다. 원조는 북경과 상해에 탄원서를 제출하고 또 한편으론 중국측과 협상을 계속하였다. 나중에 중국변호사의 조언에 따라 해방일보에 성명을 내는 한편, 60여만 달러를 납부해 중국측이 장악한 계좌를 동결했다. 그리고 국제법정에 국제 중재신청을 하여 100만 달러의 자산을 되찾아 올 수 있었다.
원조가 다시 재산권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자본금을 제때 중국에 송부했고 탈세를 하지 않았으며 회사 간부들의 도덕적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정치적 환경이 중국과 대만간에 화해무드가 조성되고 있었고 언론의 적절한 관심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중국정부의 외국인 투자유치 심리를 잘 활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후 원조는 중국측의 참여를 완전 배제, 99% 지분을 보유하고 재무감독을 확실히 하여 같은 사건이 재발되지 않도록 노력했다.
원조의 현황
상해에서 가장 번화한 四川北路에 점포 2개를 열면서 시작한 원조는 투자 2년째 이윤을 내기 시작하면서 안정적인 성장 전략을 추구하며 매년 이윤을 창출했다. 현재 상해, 항주, 무석, 성도, 북경, 심양, 무한 등지에 6개의 공장, 163개의 판매점을 갖고 있으며 앞으로 서북지역, 복건, 광동 등 동남연해 일대에 공장 3개를 더 지을 예정이다. 원조는 2000년 1억7천만위안의 매출액을 올렸고, 2001년에 가맹점 접수회사를 설립, 프랜차이징을 실시한 이후 중국자영업자들의 가맹신청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현재 가맹점은 40곳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