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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과 인민: 분절과 통합의 변증법
2025년 5월호 인차이나브리프-저자노트는 『당과 인민(The Party and the People)』의 역자인 박우 교수의 글을 실습니다. 브루스 딕슨이 쓴 『당과 인민』은 중국 공산당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분석서로, 단순한 권위주의 국가의 일방적 억압 구조가 아니라, 당과 인민의 상호작용 속에서 정당성과 통치력을 유지하는 중국 정치의 복합적 메커니즘을 탐구합니다. 박 교수는 중국의 자유주의적 민주화에 대한 외부의 낙관론을 비판하며, 억압과 협력, 권위와 친밀함이 교차하는 당-사회 관계의 복합성과 역동성을 강조하며, 권위주의 체제 내부의 제도와 사회적 긴장을 입체적으로 조망할 것을 제안합니다. » 중국의 (자유주의적) 민주화를 점치는 건 시간 낭비 중국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는 이루어질 가능성이 매우 낮다. 경제성장이 곧 정치적 민주주의로 이어진다는 건 지나치게 낙관적인 가정이다.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 자연스럽게 민주주의가 찾아올 거라는 말은, 서구 국가들 몇몇 사례에 근거한 일반화에 불과하다. 중국의 역사를 돌아볼 때 그런 단선적인 경로를 따르지 않을 거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중국 사회를 바라보는 외부 시선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하나는 서구 이론에 중국을 끼워 맞추려는 습관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에 대한 민주화의 개인적 (또는 이념적) 염원을 그대로 분석에 투사하는 태도다. 그러다 보니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매번 엇나간 해석이 반복된다. 지금 필요한 건 예언이 아니라 관찰이고, 희망이 아니라 분석이다. 실제로 지난 수십 년간 세계 곳곳에서 정권이 바뀐 사례들을 보면, 권위주의가 무너진 자리에 민주주의가 들어선 게 아니라, 또 다른 권위주의 체제가 자리 잡은 경우가 훨씬 많았다. 그렇기에 한 체제에 대해 ‘민주화될까?’라는 질문은 점점 설득력을 잃고 있다. 대신 우리는 정권의 취약성, 통치의 기반, 대중의 반응과 일상의 감각들이 어떻게 재편되고 있는지를 매우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수전에서 살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중국의 민주주의라는 이상을 믿는 것보다 중국 내부의 조건, 제도, 정치문화, 사회적 균열들을 면밀히 분석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억압하면서 호응하고, 갈등하면서 협력하며, 권위주의적이면서도 친밀한 중국의 국가(당)-사회(인민)관계의 대립쌍(또는 변증법)이 중국을 이해하는 키워드다. 이 세 개의 대립쌍에서, 각 대립쌍의 앞부분이 기존 중국에 대한 통념이었다면, 대립쌍의 뒷부분에 대한 이해가 시급하다. 중국의 국가-사회 관계는 단순한 평면이 아니라 수직적 및 수평적으로 분절되었다. 총체로서 국가를 구성하는 통합적 요소들의 관계를 발견하고, 이 관계들의 관계를 분석하고 이해하다 보면 중국이 나아갈 길들이 보일지 모른다. 아래에 당과 인민 관계의 몇 가지 현상을 이 분석 틀로 보도록 하자. »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 마오쩌둥,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 그리고 시진핑에 이르는 다섯 세대 지도자들의 우선순위를 검토하면, 중국 공산당이 어떻게 당과 국가의 관계를 조정하고 체제의 정당성을 구성해왔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각 시대의 지도자들은 체제 내에서 어떤 유형의 정치 엘리트를 우대할 것인가, 그리고 당과 국가 행정기구 간의 관계를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에 따라 서로 다른 정치적 균형을 형성했다. 예컨대 마오 시기에는 이념적 충성을 중시하는 이른바 ‘홍색 인사’가 중심이었다면, 덩샤오핑 이후 경제 발전이 주요 과제가 되면서 ‘기술관료’들이 점차 부상했다. 이후에도 정치 지도자들은 기존 계보를 유지하거나 새로운 균형을 시도하는 방식으로 권력 기반을 구축했다. 중국 정치의 주요 특징은 정당과 국가 기관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공산당은 정부(행정부), 입법부(전국인민대표대회), 사법기관 등 국가기구 위에 위치하며, 주요 정책과 인사 결정을 독점한다. 공식적으로는 ‘당의 영도 아래 다당 협상제도’라는 표현이 사용되지만, 실질적으로는 당이 모든 국가 기능을 지휘 감독하는 구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 지도자는 전혀 검증과 경쟁을 통하지 않고 출현하는 것이 아니다. 당은 관리의 선발과 승진에 있어 비교적 정교한 제도적 장치를 발전시켜왔다. 가장 하위 행정 단위인 촌이나 향 수준에서 시작해, 성이나 중앙 부처까지 위계적으로 구성된 관료제 안에서 관리들은 일정한 (객관적인) 기준에 따라 평가되고 순환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기층’이라 불리는 하위 행정단위에서의 실적이다. 지방 정부는 관할 지역의 경제 성장, 세수 확보, 사회 안정 등의 지표를 중심으로 하위 관리의 성과를 평가하고, 일정 기준 이상을 달성한 인물을 상위 단위로 승진시킨다. 이와 같은 제도는 관료의 경쟁과 성과 중심 문화를 촉진하면서도, 강한 상명하복 체계를 유지하게 만든다. 그러나 고위직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실적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정치적 인맥과 파벌 동맹은 승진에 있어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파벌은 보통 정치적 노선, 출신 지역, 과거 경력, 특정 인물과의 친분 등을 중심으로 형성되며, 이러한 네트워크를 통한 후원은 정치 엘리트 내부에서의 생존과 상승 이동의 중요한 자원이 된다. 중국은 이러한 인사 시스템을 통해 정기적인 엘리트 재편을 제도화함으로써, 권력의 지속 가능성과 체제의 안정성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료제도 하에서 정책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중국의 정책 결정 메커니즘 또한 단일하지 않으며, 사안의 성격에 따라 서로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일반적으로 정책은 다음의 세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국가 안보나 체제 유지를 위한 민감한 사안은 최고 지도부 내부에서 극히 제한된 범위 내에서 은밀하게 결정된다. 인터넷 검열, 소수민족 지역, 정치적 사건 대응 등은 체제 위협 요소로 간주되며, 정책의 공개성과 대중 참여 가능성이 배제된 채 진행된다. 둘째, 경제 정책이나 산업 전략과 같이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영역에서는 중앙과 지방 정부, 부처 간의 협상과 조율을 통한 결정 과정이 두드러진다. 중국 행정 시스템은 수직적으로 중앙-성-시-현으로, 수평적으로는 부처 간의 기능 분화를 구성되어 있다. 이로 인해 흔히 ‘부처 간 칸막이’ 문제가 발생하며, 각 기관은 자신들의 이익과 권한을 방어하는 방식으로 움직인다. 그 결과, 정책은 하나의 일관된 계획이라기보다는, 다양한 이해관계의 타협으로 형성된다. 셋째, 환경, 보건, 교육과 같은 기술 중심 혹은 비정치적 성격이 강한 분야는 비교적 개방적이며, 비공식적 참여 메커니즘이 작동할 여지가 존재한다. 특히 환경 문제는 지방정부와 주민, 시민단체, 전문가 집단 사이의 협력이나 갈등을 통해 정책이 조정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구조는 중국 공산당이 통제 중심의 권위주의 정당임에도 불구하고 정책의 유형에 따라 상이한 절차와 논리를 채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 시민사회와 집단행동 중국에도 시민사회는 존재한다. 다만 그것은 서구에서 말하는 ‘시민사회’와는 구조도 다르고 기능도 다르다. 중국에서는 보통 이를 ‘공민사회’라 부르며, 정치체제 안에서 작동하는 방식 자체가 다르다. 즉, 시민사회가 곧 국가에 맞서는 독립적인 공간이라는 전통적 서구 개념이 중국에는 그대로 들어맞지 않는다. 중국 정치 체제는 오랫동안 강한 당 중심 구조를 유지해왔다. 그래서 시민사회는 오랫동안 억눌려 있었고, 서구적 시각에서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간주되기도 했다. 특히 1989년 톈안먼 사건 이후 정부는 정치적 자율성을 가진 조직의 확산을 극도로 경계했고, 그에 따라 시민사회는 위로부터의 통제 아래 제한적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시민사회를 오직 민주화로 가는 정치적 경로로만 이해한다면, 중국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중국의 시민사회는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민주주의, 인권, 표현의 자유 같은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는 집단이다. 이들은 당국의 강한 탄압 대상이 된다. 대표적으로 인권 변호사 그룹이나, 민감한 사회 이슈를 다루는 온라인 지식인 커뮤니티가 여기에 속한다. 다른 하나는 빈곤, 환경, 교육 같은 비정치적 영역에서 활동하는 NGO들이다. 이들은 오히려 정부와 협력하며 제도 내에서 일정한 역할을 부여받는다. 중국 정부는 이들 비정치적 NGO를 ‘사회조직’으로 분류해 통제가능한 범위 내에서 정책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 중요한 건 이 시민사회가 지역에 따라 다르게 작동한다는 점이다. 어떤 지방정부는 NGO 활동을 억제하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이를 정책 파트너로 활용한다. 광둥성이나 쓰촨성처럼 개방적이고 실험적인 성향을 띠는 지역에서는 NGO의 활동 범위가 비교적 넓게 보장되기도 한다. 이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간의 복합적인 권력 관계, 지역 발전 전략, 실무 관료의 재량과도 관련이 있다. 따라서 중국의 시민사회는 단일한 기준으로 설명할 수 없다. 권위주의 국가라고 해서 시민사회가 완전히 부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시민사회의 정치적 성격이 매우 취약하다고 해서, 중국에서는 시위를 비롯한 집단행동은 불가능하고, 또는 없는 것일까? 사실 중국에서 시위는 일상적인 일이다. 매년 수만 건의 시위가 발생하지만, 정권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시위는 곧바로 체제 전환이나 민주화로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중국 정부는 시위를 정권 유지의 한 도구처럼 활용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위의 정치화’ 여부다. 대부분의 시위는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 아니라, 실질적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협상 수단으로 기능한다. 당국은 시위의 성격에 따라 대응 방식을 달리한다. 생계형 시위—임금 체불, 토지 보상, 환경 오염 등—에는 호응을 한다. 지역 차원에서 문제를 조정하거나 보상을 제공하며 불만을 흡수한다. 특히 지역 간 개발 격차, 도시화 과정의 갈등, 환경 피해 등이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 이는 체제를 위협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긴장을 완화하고, 정권에 대한 신뢰를 유지하려는 전략이다. 반면, 정치적 요구—표현의 자유, 선거제도 개혁, 인권 보장—를 내세우는 시위는 억압된다. 주동자는 체포되고, 정보는 통제되며, 시위 자체가 불온한 행동으로 규정된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당국은 완전히 그들의 요구를 묵살하지 않는다. 일부 수용가능한 요구는 제도 개선의 형식으로 반영하기도 한다. 결국 중국의 사회에 대한 통치 전략은 단선적이지 않다. 억압과 수용, 통제와 유연성을 동시에 구사하는 이중 전략을 통해 체제 안정을 도모한다. 시위는 정권에 위협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체제 유지를 위한 조정 메커니즘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는 권위주의 체제가 단지 억압에만 의존하지 않으며, 사회적 긴장에 전략적으로 호응하며 통치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 종교 및 민족주의 개혁개방 이후 중국 사회에서는 종교의 부활과 확산이 본격화되었다. 이 현상 자체도 매우 입체적이지만, 외국 관찰자들은 기독교에만 주목하고, 특히 억압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종교의 확산은 기독교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종교가 다시 살아나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그중 하나는 종교가 지역사회에 유용한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 때문이다. 농촌 지역에서는 사찰이 교육, 복지, 심리적 위안의 기능을 수행하면서, 국가 행정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을 보완하기도 한다. 그래서 정부도 이러한 종교 활동을 장려한다. 하지만 종교는 동시에 국가와 사회 사이의 갈등 원인이 되기도 한다. 경제문제나 정치문제가 종교를 매개로 표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역 불평등, 도시화에 따른 공동체 해체, 사회적 소외감은 종교의 기능을 더욱 부각시키는 동시에, 당국에게는 통제의 대상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따라서 중국에서 국가가 종교를 일방적으로 억압한다는 단순한 인식과 달리, 종교 자체, 종교 정책, 종교적 신념에 대해 국가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중국의 종교는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 사이비 종교에서부터 개신교, 천주교, 이슬람교, 불교까지 다양하다. 파룬궁과 같은 정치적 영적 운동은 대표적으로 국가가 강하게 통제하는 대상이지만, 동시에 온건한 불교 단체는 ‘중국화’ 전력을 통해 체제 친화적인 방향으로 유도되기도 한다. 따라서 중국에서 종교는 단순히 사라져야 할 유산이 아니라, 변화하는 사회에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는 주체로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종교와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고받으며 흥기했던 중국의 민족주의는 어떤 양상일까? 역설적으로 대규모 대중 시위를 꺼리는 중국 정부가 유일하게 허용하는 반대 의견의 행태 중 하나가 바로 민족주의 시위다. 2005년의 반일시위, 2012년의 센카쿠열도(댜오위다오) 분쟁 관련 시위 등은 국가가 묵인하거나 심지어 조장한 사례로 자주 인용된다. 민족주의 시위는 종종 다른 유형의 불만을 대변하는 역할도 한다. 실업, 부패, 지역 불균형에 대한 불만이 외국 기업이나 정부에 대한 공격으로 전환되기도 한다. 중국 사회가 과거보다 더 민족주의적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민족주의가 시위자들의 논리적 근거로 더 많이 활용되고 있는 건 문명하다. 한편, 국가는 애국주의 교육운동과 공식 미디어를 통해 민족주의를 홍보하면서, 이를 통해 정권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얻고자 한다. 하지만 국가는 민족주의를 조장하는 동시에 위험성도 감수해야 한다. 대중적 민족주의가 국가가 예상한 수준을 넘어서면, 오히려 국가에 저항하는 논리로 돌아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민족주의는 외교와 직결되기도 한다. 민족주의는 중국의 굴기와 이미지적으로 연결되며 때로는 국가의 협상력을 높이는 자산이 되기도 하지만, 외교적 유연성을 제한하는 부담이 되기도 한다. 이는 중국의 대중적 민족주의가 단순히 감정적 표출이 아니라 전략적 자산이자 위험 요소라는 이중적 성격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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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정세가 한눈에 읽히는 부의 지정학
2025 년 6 월호 인차이나브리프 저자노트는 『 세계 정세가 한눈에 읽히는 부의 지정학 』 의 저자인 이재준 박사의 글을 실습니다 . 이 박사는 이 책을 통해 불확실한 국제 정세 속에서 기업이 직면한 지정학적 리스크를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 그 경제적 함의를 탐색합니다 . 전통적으로 정치 · 안보 영역에서 다루어져 온 지정학을 경제적 관점에서 조명하며 , 경제안보 , 공급망 충격 , 무역 제재 등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정치와 경제의 복합적인 상호작용을 설득력 있게 풀어내고자 했습니다 . 이재준 박사의 저작은 복잡한 세계 정세를 이해하고 , 이에 대한 실용적 대응 방향을 모색하는 데 유용한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 ‘세계 정세가 한눈에 읽히는 부의 지정학’은 지정학적 리스크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책이다. 이 책은 경제적 관점에서 지정학적 리스크를 분석하고, 전망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기업이 직면한 지정학적 위험 요인들을 제시함으로써, 기업 경영과 투자 판단에 참고할 수 있도록 서술되었다. 지정학의 귀환이라고 부를 정도로 지정학이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그러나 지정학적 리스크가 경제에서 갖는 의미를 무엇인지를 보여준 책들은 찾기 힘들다. 이 책은 경제라는 관점에서 지정학을 보았다. » 지정학적 리스크의 대두 경영학에서는 전통적으로 정치적 리스크라는 말을 사용했다. 정치적 리스크는 국가 위험의 일종으로 일련의 정치적 변화로 야기되는 차입자의 지불거절, 채무불이행, 투자 활동 중단 및 진출 기업의 철수 등 제반 사태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런데 최근엔 지정학적 리스크라는 말이 투자자나 기업인에게 더 큰 울림을 주는 것 같다. 정치적 리스크가 단일 국가 차원에 더 의미를 두는 것처럼 이해되는 반면, 지정학적 리스크는 국가 간 분쟁, 갈등에 중점을 두는 것처럼 읽히기 때문이다. 특히 탈냉전 이후 자유무역 질서가 확대되고, 기업의 영업 활동이 세계로 확대되는 상황에서, 기업은 국가를 넘어선 지정학적 리스크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 국가 갈등과 경제적 후과 지금 세계에서는 국가 간 여러 분쟁이 벌어지고 있다. 유럽에서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전쟁이 지속되고 있으며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중국과 대만의 군사 충돌 상황이, 한반도에서는 북한이 무력 도발하는 상황이 우려된다. 중국, 러시아, 북한 등 권위주의 국가들의 결속에 대항해 미국은 자유주의 국가 간 연대를 기치로 내걸었다. 이른바 ‘가치 전쟁’이다. 국가 간 갈등은 기업의 국제적 사업 거래에서 심각한 장애를 일으키는 요인이 된다. 쿠바의 기업들은 미국의 장기간 봉쇄로 미국과의 거래가 막힌 바 있다. 또한 미국은 이란을 악의 축, 불량 국가 등으로 비난하면서 오랜 시간 경제 봉쇄 정책을 취했다. 이란은 원유 자원이 있음에도 미국의 대이란 제재로 수출에 어려움을 겪어왔다. 그뿐만이 아니다. 국가 간 갈등은 공급망에 지장을 초래하기도 한다. 2013년 5월 9일 조업 중이던 대만 어선이 필리핀 해양경비대의 총격을 받아 어선에 타고 있던 어민 한 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놓고 양국의 첨예한 대립이 지속되었다. 필리핀 해양경비대는 불법조업 중이던 대만 어선이 필리핀 영해에서 필리핀 경비정을 들이받으려 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응 조치로 총격을 가했다고 발표했다. 대만 정부는 이 발표에 반론을 제기했다. 항해 기록장치 분석 결과, 해당 어선이 필리핀 영해를 침범하지 않았으며, 총격이 배타적 경제수역 중첩지역에서 일어났다고 반박했다. 이 일로 대만 정부는 필리핀 노동자 수입을 동결하고 필리핀 주재 자국 대표부를 철수시켰다. 이어 적색 여행경보 발령, 고위급 교류 중단, 경제 협력 중단, 농어업 협력 중단, 과학기술 협력 중단, 항로권 협상 중단, 온라인 비자 면제 신청 중단 등의 조치를 단행했다. 심지어 대만 해군은 총격 사건이 발생한 해역에서 군사훈련도 실시했다. 대만과 필리핀의 충돌은 기업들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필리핀에서 대만 공장으로 부품을 정기적으로 가져오던 다수의 대만 IT 기업들이 심각한 압박을 받았다. 또 필리핀 노동자의 유입이 막히면서 대만 제조업체들은 제품 제조에 상당한 곤란을 겪어야만 했다. 이처럼 국가 간의 정치적 갈등은 타국의 시장 접근에 심각한 제한을 가져온다. 정부가 다른 국가에 정치적 압력을 행사하기 위해 고율의 관세를 매기면서 자국 시장에 물건을 팔 수 없도록 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2016년 7월 8일 한국은 한국 주둔 미군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제(Terminal High Altitude Area Defense, THAAD(사드)를 공식 발표했는데, 이에 중국은 크게 반발했다. 이후 중국에서는 한국에 대한 경제 제재 조치인 한한령(限韓令)이 내려졌다. 물론 공식적으로 밝힌 사안은 아니다. 하지만 사드 발표 이후 중국 시장에서 한국산 제품에 대한 대대적인 불매운동이 벌어졌다. 중국은 거대한 시장을 바탕으로 분쟁을 겪고 있는 국가들을 대상으로 자국 시장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는 조치들을 취해왔다. 특히 한국의 경우, 아이돌 그룹의 중국 공연이 금지되었으며 한국 드라마도 방영이 전면 중지되었다. 중국 시장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한국은 중국과의 갈등으로 상당한 경제적 손실을 감수해야만 했다. » 세계 곳곳의 전쟁과 지역경제 세계 곳곳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전쟁은 어떨까? 전쟁은 무역 거래 중단은 물론 원자재 가격 상승, 투자 위축 등 다양한 형태로 기업의 이윤 저하를 초래할 수 있다. 전쟁은 국가 간에도 일어날 수 있지만, 국가 하부 단위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여러 전쟁이 동시에 일어나는 다중 분쟁의 가능성도 점점 커지는 추세다. 이라크와 시리아 등에 걸쳐 형성된 이슬람 국가 Islamic State, IS는 정부군과 전쟁을 벌이면서 중동 정세의 불안을 야기했다. 이러한 중동 정세의 불안은 결과적으로 유가 상승의 위험을 부추겼다. 우크라이나 전쟁 역시 세계적인 곡물 가격의 상승을 초래했다. 전쟁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기업의 수익성을 악화시킬 수 있다. 첫째, 전쟁은 잠재적으로 수익성이 높은 지역에 대한 투자, 영업 활동을 차단한다. 기업이 특정 지역에서 영업하거나 특정 지역으로 진출하는 것 자체가 위험할 수 있다. 1974년, 많은 외국 기업의 지역 본사가 있던 레바논은 글로벌 경제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1년 후인 1975년 말, 레바논 베이루트나 다른 주요 도시에 남아 있던 모든 기업이 심각한 전쟁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레바논의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 사이에 자리하고 있던 종교적 갈등이 내전으로 번졌기 때문이다. 이 내전은 레바논에 진출한 다국적 기업들이 철수하는 사태를 불러왔다. 둘째, 전쟁으로 특정 지역을 위험에 빠뜨리면서 공급망을 방해할 수 있다. 상품 운송, 해외 기업과의 협력이 전쟁으로 무너지면서 공급망에 장애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란은 이라크의 석유 수출을 가로막기 위해 걸프해역을 공격했다. 이 공격은 핵심 해상교통로인 걸프해역의 해운 물류를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렇다면 국가 간 갈등만이 정치적 리스크에 포함될까? 사실 테러리즘 같은 비국가 형태의 갈등도 정치적 리스크에 포함된다. 테러리즘은 정치적 지지를 얻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목표로 하므로, 적에게 최대의 심리적 충격을 주는 방법을 고안한다. 대표적인 것이 2001년 9월 11일 발생한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 폭파 사건이다.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 조직 알카에다가 민간 항공기를 납치해 빌딩에 충돌시켰고, 이 모습은 전 세계인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 경제안보와 글로벌 공급망 최근 들어 지정학적 리스크는 경제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2020년을 전후로 ‘경제안보’(Economic Security)의 가치가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경제안보는 국가 경제에 대한 다른 국가의 위협에서 국가안보를 수호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자유로운 국제무역 질서가 국가 간 갈등이나 정치적 의도에 의해 교란되는 일련의 흐름 속에서 자국의 경제와 산업을 보호하는 것이 바로 경제안보다. 정치적 의도에 의해 세계의 무역질서가 교란되는 상황에서는 경제가 자유시장경제에 따라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문제에 영향을 받으며 흔들린다. 경제안보는 정치와 경제가 분리되지 않고 혼합되는 상황에서 나타나며, 결과적으로 경제 문제에서 정치적 변수의 비중이 확대된다. 한국의 메모리 반도체를 예로 들어 설명해 보자. 반도체 시장은 1980년대 초반 개인용 컴퓨터(Personal Computer, PC가 대중화되면서 급속하게 성장했다. 반도체 산업이 활성화되면서 미국 내 인건비가 상승하고, 디자인 및 공정비용 등이 증가하는 문제가 생겼다. 그러다 국제적인 분업 구조를 형성하는 쪽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반도체의 생산 단가를 낮추기 위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이에 따라 반도체 산업은 미국, 유럽, 일본, 한국 등에 분산된 국제적 가치사슬(Value Chain)로 발전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반도체 산업이 취한 국제적 분업 구조로 생산비용을 낮추는 것은 가능해졌지만, 그만큼 국가 간 정치적 갈등에 취약해졌다. 미중 전략 경쟁에 따라 미국은 반도체 공급망을 통제하고, 전기자동차 배터리에 쓰이는 중국산 소재의 수입을 제한했다. 또 한국 대법원이 과거 일제시대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일본 기업의 배상 판결을 내리자, 일본 정부는 한국을 대상으로 반도체 제조에 필수적인 소재와 부품에 대한 수출 통제에 나섰다. 우크라이나와의 전쟁 때문에 러시아는 미국과 서방으로부터 첨단기술 제조업에 사용되는 희귀 광물수출에 제재를 받기도 했다. 이런 지정학적 문제는 산업에 큰 영향을 미친다. 새로운 국가가 반도체 산업에 뛰어들기 위해서는 국가 간의 우호적 관계가 필수다. 만일 국제적으로 분업화된 반도체 공급망을 안정적으로 유지하지 못한다면, 반도체 생산이 큰 난관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반도체산업은 이런 국제적 이해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다른 국가의 위협으로 타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안보적 문제가 될 수 있다. 바로 이를 ‘경제안보’라고 한다. 경제안보라는 말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회자된 시기는 2020년 전후다. 이는 경제안보 문제가 이 시기부터 부각되었음을 의미한다. 미국과 중국의 전략 경쟁이 본격화했고, 세계 곳곳에서 크고 작은 무력 분쟁이 벌어졌다. 그 결과 국가 간 지정학적 리스크가 기업들의 국경을 넘어선 경제 거래에 훼방을 놓기 시작했다. 냉전 시기에도 경제안보는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미국 중심의 자유 진영과 소련 중심의 공산 진영으로 나뉘긴 했지만, 적어도 같은 진영 내에서는 경제안보 문제가 나타나지 않았다. 특히 자유 진영 내에서는 정치적 갈등으로 인한 무역이나 국제적분업 구조에 장애가 거의 없었다. 그러다 소련을 위시한 공산권이 무너지면서 공산-자유 진영 간에 막혀 있었던 장벽마저 사라지게 되었다. 냉전이 끝난 이후 미국 중심의 자유무역질서는 점점 더 공고화되었고, 국제적 분업 구조가 더욱 심화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이를 다른 말로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 혹은 세계화라 일컫는다. 국가 간 장벽이 허물어지는 탈근대적 세계 질서가 출현한 것이다. 기업들은 생산 단가를 낮추기 위해 여러 국가에 걸쳐서 부품, 소재를 공급받아 완성품을 만들어왔다. 탈냉전 이후 세계화와 자유무역질서를 바탕으로 형성된 전 지구적 가치사슬은 세계 경제를 안보적 위협에 노출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 계기는 바로 ‘미중 전략 경쟁’이었다. 반도체의 경우 칩 설계는 미국에서, 소재는 일본에서, 설비는 네덜란드에서 하는 등 분업화가 되어 있다. 중국이 반도체를 제조하기 위해서는 이들 국가에 위치한 기업들과 공급망을 확보해야 하는데,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여러 국가에 분산된 공급망을 통제하는 조치를 취했다. 흥미로운 점은 중국의 대응이었다. 미국의 대중 무역 제재에 대응하면서 이른바 ‘미러링 컴퍼니(mirroring company)’를 만든 것이다. 중국은 반도체 전체 공급망을 해부해 미국에 의존적인 부품을 선별한 다음,미국 기업을 대체할 기업을 자국 내에 정부 주도로 설립했다. 중국은 해외 공급망 중에서 미국의 대중 무역 제재 때문에 대중 수출이 어려워질 수 있는 기업을 선정해, 이와 유사한 기업을 중국 정부 주도로 설립했다. 해외의 기업을 마치 거울처럼 똑같이 만든다는 의미로 붙여진 용어다. 국가 간의 갈등이 불거진 것은 미중 전략 경쟁만이 아니다. 세계 곳곳에서 공급망을 위협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대표적인 예다. 2021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이끄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미국은 이를 막고자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를 단행했으며, 서방 국가들은 물론 한국과 일본 역시 동참했다. 이에 따라 러시아의 천연가스 공급이 중지되었고 러시아와의 무역에 전면적인 차질을 빚게 되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재래식 무기를 동원한 전면전 양상으로 펼쳐졌다. 이 전쟁이 지옥의 문을 열었다는 평가도 나왔다. 이후 국제적 갈등이 속속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먼저 대만에 대한 중국의 군사력 동원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대만과 통일하기 위해 군사적 수단을 배제하지 않을 것임을 밝혔다. 중동에서는 이스라엘과 이란이 후원하는 무장 정치단체 간의 군사적 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러한 국제정치적 위험 요소는 탈냉전 이후 구축해 온 가치사슬을 교란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 정치적 불확실성과 경제통치술 경제안보 개념과 유사한 용어인 ‘경제통치술’(Economic Statecraft)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경제통치술은 어떤 국가가 경제적인 영향력을 이용해 다른 국가에 정치적 목적을 관철하고자 하는 방식을 말한다. 국가들이 오랫동안 무역을 지속하는 경우 경제적인 상호의존이 생겨난다. 이러한 상호의존성이 때로는 정치적 무기가 될 수 있다. 매번 그 국가에서 구해오던 부품이나 자원이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정치적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그 부품이나 자원을 팔지 않겠다고 나서는 것이다. 갑자기 공급처를 바꿀 수도 없고, 자국에서 해당 부품, 자원을 만들어내기도 어려워 국가 경제가 큰 곤란을 겪게 된다. 결국 상대의 정치적 요구를 수용하면서 해당 부품과 자원을 사올 수밖에 없다. 즉 경제통치술은 국가가 다른 국가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경제적 자원을 활용하는 것이다. 이처럼 상호의존성은 때로는 다른 국가에 압력을 행사하는 수단이 된다 정치적 불확실성이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가 다시 돌아왔다. 미국 대통령 선거, 미국과 중국의 전략 경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동 분쟁, 대만해협 위기, 일본의 과거사 문제 등 기업 실적과 맞물려있는 지정학적 리스크가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세계 자유무역경제 질서를 제도화한 WTO 체제가 미국 패권의 상대적 후퇴와 함께 저문 것이다. 이렇게 국제 정세가 복잡하고 불확실한 시대에는 기업의 최고경영자는 물론이고, 개인 투자자들 역시 국제 뉴스를 찾아보며 변화하는 흐름을 빠르게 인지할 필요가 있다. 자신이 투자한 기업이 국제 정치망 속에서 어떤 문제를 겪고 있는지, 소재나 부품 등을 조달하는 국제 공급망의 지정학적 위험은 무엇인지 수시로 살펴봐야 한다. 흐름을 제대로 읽어내야 투자 관련 의사 결정의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으며, 손실을 방지하고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기업에 최고정치책임자(Chief Political Officer, CPO)를 두어야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최고정치책임자는 기업의 기술, 재무, 인사 부문 등의 최고책임자 외에 정치 분야를 담당하는 최고책임자를 말한다. 지난 2022년 LG그룹은 15년간 백악관에서 근무한 조 헤이긴 전백악관 부(副)비서실장을 영입하기도 했다. 헤이긴은 로널드 레이건 전대통령을 비롯해 조지 H. W. 부시 전 대통령,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등 공화당 소속 대통령 네 명의 재임 시절 백악관에서 총 15년간 근무한 이력을 지니고 있다. 통상, 규제, 공급망 등 경제안보가 중시되는 국제 정세 변화에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대처하고자 워싱턴사무소를 신설하고, 정치 리스크관리 업무를 책임져줄 인물로 그를 데려온 것이다. » 트럼프 2.0과 동아시아 2024년 11월 5일,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었다. 트럼프의 귀환으로 지정학적 리스크는 더욱 강해졌다. 먼저 미중 전략 경쟁은 트럼프 1기에서 시작되었고, 조 바이든 행정부에서도 지속했다. 그리고 트럼프의 귀환으로 더욱 격화할 것이다. 트럼프의 귀환으로 가장 큰 수혜자는 미국의 제조업이 될 것이다. 제조업은 미국 러스트 벨트 저학력 노동자들의 일자리이고, 트럼프는 이들에게 일자리를 약속해 권좌로 복귀했다. 러스트 벨트에 있던 제조 공장들은 중국 등 인건비가 싼 아시아 지역으로 이전하거나 해외 경쟁 제조 기업과의 경쟁에 밀려 문을 닫았다. 이 지역의 최대 현안은 제조업 일자리로, 결국 미국 대통령은 이 지역에 공장을 세우고 일자리를 창출해야 할 부담을 질 수밖에 없다. 이때 수혜자는 미국에 공장을 설립하는 기업이다. 미국의 제조업 기업들은 미국 정부의 파격적 지원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단 미국의 고립주의가 강화되더라도, 미국은 절대 아시아를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미국의 어떤 행정부에서도 바꿀 수 없는 지정학적 조건 때문이다. 미국은 태평양과 대서양이 안보적인 방벽은 될 수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아시아 대륙과의 연결이 필수적이다. 미국은 부의 운명이 달린 아시아 대륙에서 새로운 그 어떤 패권국의 도전도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미국이 과거와 같은 군사력을 유지하기에는 재정적 부담이 막대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아시아 지역에서 동맹국 혹은 우방국의 군사안보적 역할 확대를 기대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미국이 처한 지정학적 상황은 해상교통로의 안전을 유지하고자 하는 강력한 동기로 작용한다. 바닷길은 미국이 번영을 구가하기 위해 지켜야만 하는 부의 동맥이다. 트럼프의 미국은 아시아의 우방국들에 바닷길을 지키기 위한 안보적 역할 분담을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아시아 지역 국가들의 해군 전력 증강으로 이어질 것이며, 결과적으로 군함을 건조하는 조선업 비중이 지속적으로 확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대만해협을 둘러싸고 군사적 긴장이 강해질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는 위험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대만을 상대로 무력 수단을 사용할 수도 있음을 밝힌 바 있다. 실제 전면전이 발생하지 않더라고 중국 인민해방군은 대만을 봉쇄하는 군사훈련을 주기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이는 대만 주변 해역이 중국의 군사적 영향권 안에 들어갈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바다는 육지와 달리 국경선과 경계가 없으며, 군대를 투입해 점령할 수도 없다. 다만, 그 해역의 화물선, 여객선 같은 선박의 통항을 통제하는 권리인 제해권만 존재한다. 그럼에도 중국은 대만에 대한 주기적인 봉쇄 훈련을 실시하는 등의 방법을 활용해 대만 주변 해역의 제해권을 강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대만에 대한 중국의 군사력 사용 가능성은 반도체 공급망을 위협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TSMC와 같은 파운드리 기업은 미국의 첨단기술 기업을 비롯해 세계 각국의 기업에 반도체를 공급하고 있다. 중국의 대만 침공이나 대만을 에워싼 주기적 봉쇄 훈련은 대만 반도체 제조 기업에는 지정학적 불안 요소다. 반면 다른 반도체 제조 기업에는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 요인이기도 하다. 다만 TSMC는 이러한 지정학적 리스크를 제거하기 위해 일본을 비롯한 해외 제조 시설을 확보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중국과 대만의 군사적 충돌은 한국에는 해운 물류를 위협하는 위험 요소다. 한국 제조업은 대만 주변 해역을 통과하는 해상교통로에 대한 물류 비중이 높다. 향후 대만 주변 해역이 중국의 통제를 받게 될 경우 한국의 경제와 산업은 지정학적 리스크를 감내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이러한 대만 주변 해역에 대한 중국의 통제는 전 지구적 공급망을 교란하는 위협이 될 수 있다. 첨단산업 부품과 소재를 실은 화물선들이 통과하는 지점이자 특히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 해로가 위치하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중국이 대만 해역 주변에서 주기적인 통제를 가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대만에 대한 반도체 공급망 의존도가 높은 기업은 대만해협 위기가 발생했을 때 손실을 볼 가능성이 높다. 반면 이러한 지정학적 리스크의 직접적 영향권에서 벗어난 한국의 반도체 제조 기업으로서는 기회일 수 있다. 그러나 이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대만 주변 해역이 봉쇄되면 한국은 우회로를 찾아야 하는데, 이 경우 물류비용이 상승하는 문제에 맞닥뜨리게 된다. 다시 세계는 지정학의 시대로 돌아왔다. 지정학의 귀환은 투자자에게는 위기이자 기회라는 야누스적 모습을 갖는다. 현명한 투자자는 모두가 공포에 질려 있을 때 투자의 기회를 찾는다. 야누스의 이면을 읽을 수 있을 때 우리는 돈이 돈을 가져오는 어쩌면 기이한 마법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정치와 경제가 씨줄과 날줄로 얽혀 함께 직조되는 흥미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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